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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들 일들


아래 글은 (사)지방행정동우회 전북지회 회지 제5호에 기고한 것을 여기에 소개한 것입니다. 장상록 드림

인생이란 여정이 이제 종착지에 이르고 있는 요즈음 지난 세월 속에서 떠올리는 기억들이 있어 그중 몇 가지를 남겨 봅니다. 제가 옥구군 임피면의 전형적인 농촌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앙대학교 이리분교에 응시하였는데 중대전체의 상학과 지원자 중 수석합격자라 하여 입학금 일체를 면제받았고 수석자리를 계속 유지하여 2학년말까지 등록금을 면제받았습니다. 그후 군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2년간 학업생활을 하던 중 중간고사를 실시한 후 임철순 교수(중대총장 역임)가 강의시작전 이번 중간고사에 100점 만점자가 나왔다고 하여 외환론(Foreign Exchange)의 주관식 논술고사에서 어떻게 만점자가 있을가 의문과 선망의 눈초리를 가졌었는데 방학 중에 성적표가 집에 배달되어 보니 제가 만점인 것을 보고 기쁨보다는 논술시험에 만점 준 교수를 폄하했던 생각이 납니다.

1962년 졸업 후 당시 취직시험이 없어 무위도식하고 있던 중 우편으로 배달된 서울신문에 내각사무처의 “제2회 5급공무원임용고시” 공고문을 보고 이에 응시하여 1963년 3월부터 옥구군 양정계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내무과에서 도청에 가서 행정실무 경진대회시험을 보라고 하여 2년간 우승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후 군청에 출입하는 토목공사업자가 장 선생은 도에서 근무해야 할 사람이라면서 인사기록카드를 요구하여 주었더니 1년 뒤인 1970년 11월에 도청으로 발령되었습니다. 행정주사시절인 1974. 4월에 6개월 코스의 간부양성반 교육을 받기위하여 내무부연수원에 입교 당일 실시한 소양고사에서 1등을 하였다고 평가계장이 귀 뜸을 하여 긴장감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수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0월에 사무관에 임관된 후 내무부 연수원에 피교육자로 차출되었다는 공문을 보고서 공직생활시작 후 15년 이상 지나서 사무관이 되었는데 저는 12년 만에 되어 빨랐음을 알게 되었으나 사무관에서 17년 만에 서기관이 되어 신상관리에 무능함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1985년도에 등산을 같이 다니던 김 사장이란 분이 하루는 큰문제가 생겼다고 하여 알아보니 전주시 효자동 금구하는 도로변에 공장부지로 논 700평을 구입하여 허가신청을 하였으나 도에서 불허처분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담당업무와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 사장의 걱정을 생각하여 검토를 해 보니 괜찮다는 생각에 담당계장에게 전화하였더니 일언지하에 안돼요 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시계획법령,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 공업배치법, 주택건설 촉지법등 관련 규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질의문을 만들어 건설부장관에 발송토록 하였더니 2주 일만에 “귀견이 맞다”는 회신을 받아 공장을 건설하여 지금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년퇴직한 후 김 사장이 다시 찾아와 전주시에 주유소허가 신청을 했더니 불허처분 되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전주시청 담당과장에게 전화로 허가에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유를 물은즉 시장이 결재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결책을 강구 끝에 행정심판청구를 하기로 하고 대한민국 법령집이 있는 도청 공로연수사무실에서 관련 볍령을 검토정리하여 행정심판청구서를 도 법무담당관실에 제출하였더니 얼마 후 “인용“ 결정이 나와 주유소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지인이 건축허가신청을 완산구청에 하였는데 불허처분 되었다고 하소연 하여 행정심판청구서를 작성제출하여 인용받아 해결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가마귀는 시신을 쪼아 먹지만 아첨은 생사람을 잡는다.”라는 소크라데스의 말과 “벼슬이 백성을 위하지 못하려면 고향에 돌아가 감자 심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중국 속담의 함축성을 반추하며 공직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만 입신양명하지 못한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장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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